본질적인 것,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순수한 열정을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하여

고도를 기다리며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Waiting for Godot’ 라는 희곡을 아시나요?
거기에는 고도를 기다리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아이러니하게 그들은 기다린다는 거에 대한 자각도 없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왜 기다리는지도 모른 채로 서로에게 계속 말을 걸며 대화를 주고 받죠.
그런데 그들의 대화가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대화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혼자 독백을 하는 것 같고,
질문을 하지만 전혀 듣고 있지 않는 것 같고,
이따금 말이 통하는 것 같이 보이나 그것도 잠시 뿐인…
그런데도 두 사람은 계속해서 말을 걸며 함께 고도를 기다립니다. 결국 고도는 오지 않지만.

갑자기 웬 고도냐구요?

[생각 드롭] 문자가 영상보다 나은 이유

[생각 드롭]
작성자
민나인 민나인
작성일
2026-03-12 18:57
조회
9
문자가 영상보다 나은 이유

요즘 나는 책을 읽다가 자꾸 멈추는 버릇이 생겼다.

사과 한 입 베어 물고, 방금 읽은 문장을 다시 씹어보는 것이다. 그러다 다시 책을 집어 들고, 또 내려놓고. 누군가 보면 산만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 과정이 독서의 본질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글은 그렇게 읽는 것이 아닐까. 한 번에 통째로 삼키는 것이 아니라, 씹고 소화하고 다시 음미하는 것.

반면 영상은 다르다.

영상은 멈추지 않는다.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 비판하고 반성할 여백도 없이 그냥 흘러 들어온다. 심리학 매체 '사이콜로지 투데이'에 따르면 영상은 텍스트보다 뇌에서 6만 배 더 빠르게 처리된다고 한다. 빠르다는 건 좋은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 그 속도는 인지 능력을 우회해 바로 감정 회로를 건드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생각하기 전에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영상은 설교와 닮았다. 일방향이다. 보는 사람은 그저 받아들일 뿐, 끼어들 틈이 없다. 게다가 알고리즘이 쏘아대는 짧은 영상들은 나뭇가지를 옮겨 다니는 원숭이처럼 마음을 들썩이게 만든다. 잠깐 머물다 금세 다른 곳으로 튀어 오르는 것. 정해진 방향 없이 이리저리 표류하는 주의력.

글은 그 반대다.

글은 독자에게 무언가를 요구한다. 페이지 위의 기호를 머릿속 풍경으로 전환하는 작업, 그 수고로움을 요구한다.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글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습득하는 행위가 아니라 생각하는 근육을 쓰는 일이다. 책의 내용과 무관하게, 독서 자체가 우리를 더 단단한 사유자(思惟者)로 만든다.

물론 영상이 나쁘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영상만이 전달할 수 있는 것들이 분명 있다. 다만 우리가 점점 글을 멀리하고 영상에 기대는 방향으로 흘러갈수록, 어딘가 중요한 것을 잃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은 결국 스스로 멈출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과 맞닿아 있다. 사과를 먹으며 잠시 내려놓는 것. 그 여백이 사유를 만든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성경을 편다. 수천 년 전 문자가 아직도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이, 읽을 때마다 새삼 경이롭다. 영상이 넘쳐나는 시대에 가장 오래된 책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 — 어쩌면 그게 문자가 가진 힘의 가장 오래된 증거인지도 모르겠다.






"스치는 생각을 그냥 툭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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