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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았다’는 감정, 그 오래된 이름

(구원) 길을 찾다: 다시 시작하는 여정
작성자
민나인 민나인
작성일
2026-01-14 22:18
조회
30
구원, 종교 밖에서도


우리 모두가 찾고 있는 그 무엇


“와, 씨이~, 살았다 진짜…”

이 말, 오늘도 한두 번 하지 않으셨습니까?
교통사고 피했을 때, 시험 망쳤는데 합격 통지 왔을 때, 월급날 전에 통장 잔고가 바닥났는데 갑자기 돈 들어왔을 때...
그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가 다시 올라오는 그 느낌.
그게 바로 ‘구원의 감정’이라 볼 수 있습니다. 무너질 수 있었던 나를 경험한 순간이며, 그 절박함 속에서 다시 살아났다는 감각입니다. 이 감정은 우리가 종교적인 언어를 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일종의 본능적 언어입니다.

현대인들은 이 감정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위기 탈출”, “회복”, “재시작”, “해방”…
이름은 달라도 결국 다 “다시 살아났어”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코 내뱉는 이 '살았다' 속에는, 사실 인간 존재에 대한 아주 깊은 질문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의 삶과 죽음을 고민해 왔고 우리와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 이들이 있습니다. 셀럽처럼 유명한 거 같지만 이름만 들으면 머리가 아픈 인류의 스승이라 불리는 철학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감정의 뿌리를 캐내기 위해 좀 더 집요하게 파고들었습니다.

오늘은 지난 글들과는 달리 조금 딱딱한 분위기일 수도 있습니다. 철학과 종교를 언급해야 하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최대한 알기 쉽고, 재미있게 풀어갈 테니 여러분들은 커피 한잔 하시며 천천히 따라 오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도 한 번쯤은 들어 보셨을 이름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 그는 인간을 “죽음을 향해 던져진 존재”라고 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끝이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마주할 때 우리는 불안하지만, 비로소 자신답게 살 수 있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 불안이 오히려 우리를 깨우는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아, 나 진짜 살아야겠구나”하는 순간, 그것은 어쩌면 구원의 입구일 수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도 많이 들어 보셨을 겁니다. 그는 더 직설적이었습니다.
“인간은 절망하는 존재다.”
그런데 이 절망은 우울증이나 좌절 같은 게 아니라, “내가 진짜 누구인지 모르고 사는 상태”를 말합니다. 남들 눈치 보고, SNS '좋아요' 수 따라가고, 성공 기준에 맞춰 사는 거 말이죠(이거... 대한민국?).
그는 말합니다. 그걸 깨닫고 직면할 때, 비로소 진짜 나로 돌아갈 수 있다고. 그때 비로소 구원이 시작된다고 말입니다.

20세기 개신교 신학자인 틸리히는 “우리는 소외된 존재”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타인으로부터도, 세상 전체(근원)와도 단절된 존재랍니다. 본래의 자기 모습을 잃어버리고 사회적 역할이나 가면(페르소나) 뒤에 숨어 살면서 느끼는 공허함,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채워지지 않는 근원적인 고립감, 그리고 내가 왜 사는지, 이 거대한 우주에서 내 자리가 어디인지 알 수 없을 때 느껴지는 소외가 만들어내는 불안을 그는 “존재의 불안”이라고 불렀습니다. 틸리히는 그 불안을 피해가지 않고, “그래도 의미 있는 걸 붙잡고 살아보겠다”는 용기를 믿음이자 구원이라 보았습니다.

이 말들을 들어보니 어떻습니까? 너무 사변적이라 이해하기가 어렵습니까? 구원을 향한 갈망은 비단 철학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들 또한 일상에서 이미 경험하고 있고, 자주 구원을 찾기 때문입니다.

내가 우울할 때 “야, 괜찮아. 같이 이겨내자”는 친구의 한마디에 눈물 왈칵 나는 순간.
오랜만에 엄마 전화 받아서 “엄마 목소리 듣고 싶었어”하는 순간.
영화관에서 주인공이 모든 걸 잃었다가 다시 일어서는 장면 보고 나도 모르게 주먹 쥐는 순간.

이 모든 게 다 조용한 구원의 맛보기입니다.

외면은 멀쩡하게 보여도 위태로운 현대인의 내면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요? 인간 사회는 더욱더 다양한 방식으로 구원을 말합니다.

정치에서 구원은 억압과 불의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민주화 운동이나 인권 투쟁은 단순한 제도 개혁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자유를 회복하려는 몸부림입니다.
심리학에서 구원은 내면의 회복입니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상처를 통합해 새로운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과정, 이것은 단순한 치유를 넘어서는 깊은 통합의 순간입니다.
예술에서도 구원은 나타납니다. 누군가는 “그 영화 보고 내 인생이 바뀌었어!”라고 말합니다. 예술은 우리 안의 깊은 상처를 건드리지만 동시에 위로하고, 고통을 이해 가능하게 만듭니다.
과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질병을 치료하고 생명을 연장하며, 기후위기나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술은 우리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종교들은 어떨까요? 종교는 오랜 시간 구원이라는 주제를 근본적으로 다뤄왔고, 각자 방식으로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간략하게 훝고 지나가 볼게요.

불교에서 구원은 “해탈(解脫)”이라고 합니다. 고통의 뿌리가 욕심과 집착에 있다고 보고, 그걸 내려놓으면 더 이상 괴로움의 바퀴(윤회)를 돌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힌두교는 “모크샤(Moksha)”라고 부릅니다. '나'라는 작은 ‘나’가 사라지고, 우주의 큰 본질(브라만, Brahman)과 하나가 되는 상태. “나 혼자라는 착각(?)”에서 벗어나 "'나'라는 경계 자체가 원래 없었다"는 깨달음에 이르는 경지입니다.
이슬람에서는 알라(神)께 완전히 맡기는 삶이 구원입니다. 내 힘으로 안 되는 걸 인정하고, 선한 일 하면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 심판의 날에 “잘했어, 들어와” 소리 듣는 게 목표입니다.

어떻습니까? 종교마다 저마다의 언어로 다르게 포장했을 뿐, 그 끝에 닿아 있는 본질은 하나라는 걸 알 수 있죠. "한계를 가진 나를 벗어나, 영원한 무언가와 연결되고 싶다."는 갈망, 그리고 그 연결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 마음.

이처럼 서로 다른 전통들은 다양한 길을 제시하지만, 그 바탕에는 인간이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 더 깊은 의미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자리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결국 ’구원’은 종교의 언어만이 아니라, 철학, 예술, 정치, 심리, 과학 등 인간이 살아가는 거의 모든 영역에 이미 흐르고 있는 주제입니다.

영원한 무언가와 연결되고 싶은 인간의 갈망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 남았군요. 우리 모두가 ‘살았다!’하며 느끼는 그 감정, 철학과 종교가 수천 년간 붙잡고 씨름해 온 가장 큰 질문.
그 질문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성경은 이 모든 인간적 갈망에 대해 어떤 대답을 주고 있을까요?

다음 글에서는 이 질문에 대해 함께 탐구해보려 합니다.

이 꼭지글 마지막 문장을 쓰는 지금, 저도 "와! 살았다. 드디어 끝났네"라는 안도감과 동시에 작은 구원을 맛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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