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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알려주마: 용어들
성경 해석을 위한 기초 작업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시(詩)나 소설을 감상하는데 반드시 문학 용어를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만, 저자의 문학적 기법과 숨은 동기 등을 이해하면 그 작품세계에 들어 가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그런 작업을 하려면 먼저 기본적인 용어들을 알아두면 편하죠. 성경도 마찬가지 입니다. 저자의 글쓰기 장치에 익숙해진다면 성경의 맥락과 의미를 파악하는데 훨씬 수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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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비평 (2): 오리엔테이션 - 성서비평의 시작과 현재
작성자
민나인
작성일
2025-12-30 16:52
조회
34
성서를 비평한다고요? (2)
― 이 질문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 걸까요?
지난 글에서 우리는 이런 결론에 가까워졌습니다. 성서를 비평한다는 건 믿음을 버리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더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작업이라는 것. 까기 위한 칼이 아니라, 보기 위한 돋보기라는 말이었죠. 그렇다면 이제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이어집니다.
“이런 생각은 대체 언제부터, 어디서 시작된 걸까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성서비평은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걸까요?”
성서비평은 어느 날 갑자기 신학교 연구실에서 ‘툭’ 튀어나온 괴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성경을 진지하게 읽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싹이 트고 있던 질문의 역사에 가깝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눌 내용은 좀 어렵기도 하고 긴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최선을 다해 쉽고 재미있게 풀어 나갈 테니 여러분들도 천천히 읽으면서 따라오시길 바랍니다.
1. 성서비평은 성경 안에서 이미 시작
조금 의외로 들리실 수도 있지만, 성서비평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는 성경 안에 이미 들어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볼까요?
구약성경에는 같은 사건을 다르게 말하는 이야기들이 꽤 많습니다. 사무엘서와 역대서를 나란히 읽다 보면, 같은 왕 이야기를 하면서도 평가가 다르고, 강조점이 다릅니다. 출애굽 사건도 그렇고, 다윗에 대한 묘사도 마찬가지죠.
사무엘하 24:1 vs. 역대기상 21:1 사무엘하 11-12장 vs. 역대기상 → 아예 생략 열왕기상 11장 vs. 역대기하 1-9장 (※ 주: 비교하면서 읽어보길 권합니다!)
이건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인 해석입니다. 이미 성경 안에서 저자들은 질문하고, 선택하고, 강조하며 이야기를 다시 구성하고 있는 것이죠.
신약으로 오면 더 분명해집니다. 마태·마가·누가·요한, 네 복음서는 예수님의 같은 생애를 다루면서도 전혀 다른 색깔을 띱니다. 마태는 유대인 독자를 의식하고, 누가는 이방인과 사회적 약자를 바라보고, 요한은 아예 “이 이야기는 의미를 읽어야 합니다”라고 말하듯 상징으로 가득 채웁니다.
이미 성경 자체가 “있는 그대로의 기록”이 아니라 해석된 기록, 신앙 고백으로 정리된 기록인 셈입니다. 그러니 성경을 읽으며 “왜 이렇게 썼을까?”, “왜 이 장면을 이렇게 배열했을까?”라고 묻는 것은, 성경을 거스르는 질문이 아니라 성경의 방식에 참여하는 질문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성서비평이 어떻게 전문적으로(?) 시작이 되었는지 알아봐야겠습니다.
사실 '성서비평'은 신학교 한학기 커리큘럼이라고 할 정도로 방대한 주제인지라 이 지면에 모든 '썰'을 풀기에는 불가능합니다. 이에 최대한 간략히 핵심만 정리해서 말씀드리고, 주요 인물들과 신학자들은 상식 차원에서 몇 명 정도만 언급하고 지나갈게요.
성서비평은 계몽주의 시대에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 그전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시대에 이미 조짐이(?) 보였었죠. 에라스무스 같은 인문주의자들이 “성경은 라틴어가 아니라 원어로 읽어야지!” 하면서 히브리어와 헬라어 본문 연구를 강조했구요, 우리가 잘 아는 루터와 캘빈 같은 종교개혁자들도 “성경이 권위의 중심이다”는 걸 외쳤지만, 동시에 성경 본문 자체에 대한 비판적 성찰도 시작됐죠.
즉, ‘성경이 신적(神的)이니까 그냥 무조건 믿어!’가 아니라, '성경을 더 깊이 알고자 한다면 분석이 필요하다'는 움직임이 서서히 나온 겁니다. 또한 중세의 유대 랍비들 중에는 이미 모세가 자기 죽음을 기록했을 리 없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고(※ 주: 신명기 34:5~8), 교부들 중에도 본문 간의 차이를 인식하고 글자 그대로의 의미뿐만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속뜻을 살펴보기도 했죠.
하지만 이들 또한 어디까지나 신앙 내부의 해석이었지, 성경 전체를 역사·문헌 차원에서 재검토하자는 시도로까지는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여러 버전의 성경을 대조하며 읽는 데서 오는 유익이 있다.
2. 본격적인 성서비평은 '이성'과 함께
하지만 중세를 지나 근대로 들어오면서, 르네상스 토양에서 자라난 '계몽주의'라는 꽃이 만개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전통이 말하니까 믿는다”에서 “왜 그런지 이유를 묻자”로.
이성, 역사, 문헌, 자료… 사람들은 성경도 이 질문의 대상에 올려놓기 시작합니다.
“이 책은 언제 쓰였을까?” “누가 썼을까?” “이 이야기는 실제 역사일까, 신앙적 표현일까?”
여기서부터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근대적 성서비평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성경을 고대 문헌으로서 진지하게 분석하기 시작한 것이죠. 이즈음에서 우리는 두 사람을 기억해 두면 좋겠습니다.
먼저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명언으로 유명한 사상가는 누구? 네, 스피노자(Baruch Spinoza)입니다. (※ 주: 검색을 해보니 이 말을 남긴 사람이 스피노자가 아니라네요. 출처 불명 가짜 명언이랍니다) 그는 "모세가 자기 자신의 죽음을 기록할 수 있었을까?"라는 아주 상식적인 질문을 던지며, 오경의 저자가 모세 한 사람이 아닐 가능성을 제기하며, 성경을 역사 문헌처럼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기적도, 예언도 먼저 역사적·문맥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면서 말이죠. 아! 물론 그는 유대 공동체에서 파문당했고, 기독교 사회에서도 위험 인물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장 아스트뤽(Jean Astruc)이라는 프랑스 의사입니다. 의학 교수이면서도 성서학도 연구했는데요, 이 양반이 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죠. 그는 창세기를 읽다가 하나님을 부르는 이름이 1장에서는 '엘로힘', 2장은 '야훼'로 나뉘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모세의 저술이 아닌 여러 원본 문헌으로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 주: 한글성경은 '하나님'과 '여호와', 영어성경은 'God', 'LORD'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의 이러한 연구는 후에 성서 뒤에 여러 '자료'가 숨어 있다는 '문서가설'로 발전하게 됩니다.
아무튼 아스트뤽은 성서의 기원을 비평적으로 분석하는 현대적 방법론을 도입하고, 성서 본문 속에 담긴 여러 자료의 흔적을 발견하여 성서 연구사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성서비평은 19세기 독일에서 본격적으로 집요해집니다. 여기서부터는 정말 독일답습니다. 한 번 물면 끝을 봅니다. 이때의 학자들은 성서를 하나의 '역사적 문헌'으로 대하며 아주 꼼꼼하게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분과들이 생깁니다. 문서비평, 형식비평, 편집비평, 전승비평 등등... (저는 벌써 머리가 어질어질 하네요)
짧게 정리해 보죠. 계몽시대 이후부터 19세기 독일에 이르는 성서비평은 대체로 이렇습니다.
• 성경을 역사 속에서 형성된 문헌으로 읽는다 • 저자, 시대, 편집 과정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 신앙을 부정하기보다, 신앙이 형성된 과정을 이해하려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신앙을 지워버린 연구들도 있었고, 그래서 반작용도 생겼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성경을 너무 ‘인간의 책’으로만 다루기도 했고, 신앙의 차원은 아예 연구실 문 밖에 두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자연스럽게 경계하게 됩니다.
“저거 위험한 거 아니야?” “저러다 성경 다 해체하는 거 아냐?”
이런 반응..?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방향으로 흘러간 연구들도 있었으니까요. 처음에 보수적인 교회는 성서비평을 '신앙을 파괴하는 적'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신학자들은 이 비평이 오히려 신앙을 더 단단하게 만든다는 걸 깨달았죠. 중요한 건, 칼의 문제가 아니라 칼을 쥔 손의 문제라는 점이라는 것입니다. 같은 도구라도, 무엇을 위해 쓰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습니다.
그들의 치열한 연구가 '생각하며 믿는 길'을 연 셈이다.
3. 그래서 지금은?
그래서 성서비평은 지금 ‘방향 조정’ 중입니다. 요즘의 성서비평은 예전처럼 단순하지 않습니다. “역사냐, 믿음이냐”라는 이분법에서 많이 벗어났다고 볼 수 있죠. 오늘날의 성서비평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분명 역사 속에서 형성된 책이지만 동시에 신앙 공동체의 고백이며, 지금도 독자와 만나 의미를 만들어 가는 살아 있는 텍스트라는 것. 그래서 최근의 흐름은 하나만 묻지 않습니다.
• 이 본문은 언제 쓰였는가? • 누가, 어떤 공동체에서, 어떤 상황 속에서 썼는가? • 왜 이 이야기가 이렇게 전해졌는가? • 그리고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 질문들은 서로 싸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역사를 무시한 믿음은 공중에 뜨고, 믿음을 지운 연구는 생명력을 잃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성서비평은 ‘해체’보다 ‘이해’, ‘파괴’보다 ‘맥락 읽기’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이제 마무리를 해야겠군요. 위에서 기라성(?) 같은 유명한 신학자들과 여러가지 방법론의 예시들을 언급하려다 고민 끝에 생략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신학자들의 이름이나 그들의 비평방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4. 성서비평에 대한 단상
우리에게 더 중요한 건 이것입니다. 이 비평들이 성경을 ‘덜 믿게’ 만들었느냐, 아니면 ‘다르게 읽게’ 만들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19세기 성서비평의 핵심 공헌은 새로운 기술을 발명한 데 있지 않습니다. 성경 앞에서의 태도 하나를 바꿔 놓았다는 데 있습니다.
성경을 ‘질문 없이 받아들이는 책’에서 ‘질문하며 대화해야 할 텍스트’로 옮겨 놓았다는 점, 바로 그것입니다. 이 전환 덕분에 성경은 더 이상 유리 진열장 안에 고정된 성물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사람들의 삶과 씨름하며 계속해서 읽히고, 해석되고, 다시 물어야 할 이야기로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성서비평은 성경을 신화적 환상 속에 가두지 않고, 우리가 발 딛고 사는 구체적인 역사 안으로 가져다 놓았다고 생각합니다. 덕분에 신학은 단순히 교리를 외우는 학문이 아니라, 시대와 호흡하며 인간의 고통과 희망에 응답하는 생생한 학문으로 자리 잡게 되었구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책이 되려면.......?
우리가 이 복잡한 지도의 길을 잠시 훑어본 이유는 분석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라는 거울에 낀 관습의 성에를 닦아내고 그 너머에 계신 진리를 더욱 투명하게 마주하기 위해서임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성서비평을 통해 우리는 박제된 문자가 아니라, 수천 년 전 사람들의 숨결이 묻어있는 살아있는 이야기를 만나게 되고, ‘믿음을 떠난 사고’가 아니라, ‘더 깊이 있는 믿음’을 위한 '성찰의 통로'로 삼아야 된다고 믿습니다.
이제 다음 시간에는 성서비평의 여러 방법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질문, ‘전승과 편집’을 본격적으로 들여다보려 합니다.
“성경 속 이야기들, 처음부터 이렇게 책으로 존재했을까요?”
대부분의 성경 이야기는 처음엔 입에서 입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로, 공동체의 기억 속에서 전승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서 그 이야기들은 기록되었고, 또 누군가에 의해 편집되었습니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묶고, 어떤 순서로 배치할 것인가. 이 결정들 속에는 신앙이 담겨 있고, 신학이 담겨 있으며, 그 공동체의 고민이 고스란히 들어 있습니다.
기억하시죠? 성경은 하늘에서 책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과 질문과 신앙 속에서 천천히 빚어져 온 이야기라는 사실을. 이제부터는 돋보기를 들고, 본문 안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